글 너머의 봄
- RollingTea 구르다

- 2월 3일
- 3분 분량
차와 사람과 이야기 08
: 임포 林逋
송나라 시인 임포(林逋)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烹北苑茶有怀》
石碾輕飛瑟瑟塵,乳香烹出建溪春
世間絶品人難識, 閑對茶經憶古人
<북원의 차 마시며 생각하기로>
절구에서는 푸른 빛의 가루 날리고
찻물에서는 건계차의 향기 풍기는데
이다지도 좋은 차를 아는 사람 많지 않아
다경을 펼쳐 놓고 옛사람을 생각하네
푸젠성 건계(建溪) 지역에서 났다는 건차를 건계춘이라 불렀다. 차를 봄으로 지칭한 옛사람들의 생각이 재밌다. 고려 사람 이규보는 술을 봄이라 했는데, 누구는 차를 봄이라 하기도 한다. 술이 봄인 이유는 마시면 얼굴에 꽃이 피기 때문이고, 차가 봄인 이유는 봄에 만들기도 하지만 정신을 훈훈하게 피워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마셨다는 건차는 황제에 올리는 공품(貢品)으로 10세기 초반부터 이름 높았고 이 풍습이 명나라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공품으로서의 차는 전용 차밭에서 만들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북원(北苑)이다. 차계의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기록이고, 또한 명품 중의 명품이었던 셈인데 당연히 육우가 살았던 당나라 시절에는 없던 차였다. 차를 빻는 절구나 잘 갈아낸 차 가루, 갈아낸 차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찻숟가락으로 저을 때 나는 향기 등으로 간추려 보면 그가 마신 것은 점차(点茶)였다. 당연하게 송나라 시대니, 당나라 때 유행했던 자차(煮茶)가 아니었다. 물론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도 자차가 점차와 함께 유행했지만, 중국 사람들은 종주국답게 유행에 민감하고 이를 선도하기를 좋아했나 보다.
좋은 차 마시고 기분도 더러 상쾌했을 그가 아쉬워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당나라의 차성(茶聖) 육우 때 이 차가 있었다면 반드시 다경에 그 기록을 남겼을 것이고, 그랬다면 지식인지다 탐미주의자로서 자신의 취향이 더 도드라져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유난히 독특한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는 자신이 좋아하고 아끼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에 관해 누구에게도 딱히 알리려 하지 않았다. 상대가 원하면 기꺼이 가르쳐주고, 말하지 않으면 취향을 강요하지도, 그 이전에 건네려 들지도 않았다. 나는 어릴 때 그 사람이 신비주의 콘셉트를 지나치게 고수한다고 생각했다. 구두쇠나 이기적인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고집스럽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는 그저 멋지고 바람직한 어른이었을 뿐이다.
좋은 차를 많이 알고 자주 마실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일이겠다. 알려지지 않은 좋은 차를 발견하고 사실에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는 따듯한 사람이다. 그때의 차는 지금보다 더 호사가의 일이었기에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따듯한 사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육우를 생각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우리나라에만 태어났어도 얼마나 애간장이 탔겠는가.
《咏秋江》
苍茫沙嘴鹭鸶眠 , 片水无痕浸碧天。
最爱芦花经雨后 , 一蓬烟火饭鱼船。
<가을 강을 노래하다>
아득하니 우거진 모래부리서 백로는 잠을 자고
물 조각 흔적 하나 없이 푸른 하늘을 물들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갈대꽃 하나 비에 떨어지면
물고기잡이 배 위에 한 줄기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네
일찍이 공부와 친해 세상 경서를 다 섭렵했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의외로 관직에 집중해 나아가지 않고 세상을 유람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정착한 곳은 항저우의 서호(西湖)였는데, 현재의 부촌이기 이전부터 세상 유명한 호사가들과 탐미쟁이들이 모여 살았다. 임포는 서호 주변을 유람하며 이름난 고승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했고 만나면 시를 써서 그날의 기분과 감상을 기록하길 좋아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렇게 쓴 시를 완성하면 그 자리에서 버리고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인데, 보기에 선(禪)에 관한 그 나름의 해석이지 않았을까 싶다. 차만 마시고 돌아다니던 호사가에 한량은 아니었을 것이다.
옛날 대학에서 언어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세세한 이론이나 원리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지만 잊히지 않는 것 하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뜻을 언어로 채 절반도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도 섬세하고 동시에 파괴적이며 게다가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폭탄이 셈이다. 복잡한 논리회로와 수없이 많은 경험으로 수 천 년을 보완한 것이지만 여전히 그 자체로 미완성이다. 그것뿐인가. 언어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배우고 익히기 시작하면 그 영향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다. 언어가 의도하는 대로 생각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따라서 어떠한 언어의 환경에서 배우고 자라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기도 한다. 볼셰비키의 언어로 자란 아이는 볼셰비키가 되고, 물리학자의 언어로 자란 아이는 과학적 사고를 하게 된다. 폭력의 언어로 자란 아이는 어두운 충동의 씨앗을 품게 될 것이다. 십오 년이 지나서도 선생이 말 한 가지는 기억하는 걸 보면 나는 꽤 괜찮은 학생이지 않았나 싶다.
언어는 우리의 뜻을 다 담을 수 없기에 오해하기도 하고,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이 일기도 한다. 똑같은 문장에 점 하나를 더 찍느냐 마냐에 따라 느낌도 달라진다. 어떨 때는 열 마디 말보다 이모티콘 하나, 기호 하나가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아마도 이름난 선승(禪僧)과의 교류에서 임포는 백가(百家)의 경서 만 권보다 어떨 때는 갈무리하고 정리해서 버리는 편이 낫다는 걸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때가 10세기에서 11세기로 넘어가는 무렵이니 임제종을 중심으로 한 남종선이 정토교와 함께 크게 유행했다. 그 경향을 생각해 보면 임포의 기행은 어쩌면 기행에 속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후에 인종(仁宗) 황제가 그를 화정선생(和靖先生)의 호로 불렀다 하니 기행보다는 갈무리(和)에 가까웠을 것이다.
자연을 향한 구애는 항상 선과 어딘가에서 맞물려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렇다저렇다 설명하지 않아도 풍기는 넉 줄의 정취는 마치 향을 꽂아 신비와 경외로 하늘에 기도하는 구도자의 마음 같다.
정 다 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