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안회와 아비
- RollingTea 구르다

- 1월 5일
- 3분 분량
차와 사람과 이야기 06
: 안회 盧仝, 노동 盧仝
바람이 차다. 콜록대는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창틀 틈새로 남도에도 겨울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적군의 야심한 발소리가 들린다. 아프지 말라고 쳐 놓은 난방 텐트 속 한 평도 되지 않는 온기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고, 아이의 콧방울 아래로 노란 액체가 흐르면 이어 야습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들썩이는 한 줌만 한 몸뚱이 한 가운데 명치가 요란하게 들쑥날쑥하며 오르내리고 몸은 뜨거워지는데 어미는 가만히 지켜보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쩐지 눈 앞에 펼쳐진 이 전장의 풍경이 시꺼멓게 물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색깔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음에 멍이 들어 보랏빛 멍울이 점점 깊어서 만들어낸 검은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의 가장 아끼는 제자 안회는 단사표음(簞食瓢飮)이란 단어로 살았다. '하루에 밥 한 그릇, 물 한 사발'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문일지십(問一知十),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사람이기도 했다. 불천노(不遷怒)한 사람이기도 했으니 '자신의 화를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요약하자면 그는 가난하지만, 천재였고, 천재지만 품성이 빼어나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었던 셈이다. 그는 스물아홉에 가난으로 머리가 이미 하얬다. 그렇게 살다 배고파 죽었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 이를 자랑으로 여겼는데, 청빈과 인덕의 상징이 되었다. 지식을, 부귀를 구하는데 쓰지 않고 사람됨에 모두 썼다는 점이 놀랍다.
당나라 시대 노동은 일곱 잔의 차를 마시고 노래한 시인으로 이름 높다. 그의 재능과 품성을 기려 한유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선생은 낙성에 살고 있지만, 허물어진 집 두어 칸뿐이네. 남자 종 하나는 긴 수염에 머리도 못 싸맸고, 여자 종 하나는 맨다리에 늙어 이도 다 빠졌군."
노동은 당대의 역당들을 비꼬는 시 쓰기로 이름이 높아 한평생 불우했는데, 서울에 살면서도 가난함이 이루 말할 수 없어 재산이었던 노비들 입힐 멀쩡한 옷 한 벌 구해주기도 어려웠다. 또 어떤 이는 노동의 집에 들어가면 부엌에서 불씨가 말라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고, 방 한쪽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아낙네의 기침 소리만 들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동은 의연함과 기개, 청빈함을 시로 승화시켜 불굴의 작가이자 후세의 영웅이 되었다. 송나라 소식은 그를 존경해 자신의 호를 '동파'라 지었으니, 동쪽의 쓰러져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쓰러져가는 집은 노동의 그 집을 뜻한다.
아비의 청빈한 마음이 아이들에게도 잘 전해졌으면 좋았겠다.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부쩍 많이 하게 된다. 차시를 공부하고 수업하며 학생들에게 종종 이렇게 묻곤 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시를 쓴 차인이 당신의 남편이거나 아버지라면 어떨 것 같나요?' 나는 그래도 행복했을까, 아니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문밖으로 도망치는 삶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아예 나에게는 선택권이라는 것이 없었을까. 당시에는 선택이라는 권리를 누릴 사치도 없었을 시대였을지 모른다. 차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일까. 차를 통해서 무언가를 구해야 한다면 그것은 나와 가까운 사람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움켜쥐고자 하는 무형의 의미를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일까?
다달이 나가는 카드값과 적금을 저울질하며 무거워지는 마음 한편으로 나풀거리는 일곱 색깔 무지개 나이론 치맛자락 너머 행복하게 달음박질치는 아이의 얼굴이 보일 때 우리가 거기에서 뜻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시퍼렇게 멍든 손등과 갈라진 손톱 끝 너머 움켜쥔 손바닥 안에 겨우내 말라버린 하얀색 풀꽃 한 송이를 품어 아비에게 주려는 마음이 아이의 것이라면 세상 모든 공부는 이를 위한 것이 옳지 않을까. 노동이 그 살림살이에 차를 마셨다는 것이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제값 주고 사지는 못했겠지. 그럼에도 팔아 사재를 챙겨 쌀을 사지 않고 끓여 직접 마셨다는 생각을 하며 부아가 치밀 때가 있었다. 지금 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비로서의 마음가짐을 느끼게 된다. 차는 취미도, 사치도, 자랑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역할 앞에 선 나를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다. 아비도 다 같은 아비가 아니고, 학생도 다 같은 학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해서 아비가 되지 않았어도, 더 나은 아비가 될 가능성은 오롯이 내 몫이다. 직업 앞에 선 나도, 아내 옆에 선 나도, 신 아래 무릎 꿇은 나도 모두 역할을 다할 뿐이다. 차는 이를 마주 보게 한다. 복잡한 과정과 지루한 기다림, 귀찮은 반복을 견디면서 내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아비가 될 수 있다면 내 아이는 배가 고파도 사랑으로 배부를 것이다. 좋은 옷을 입고 싸늘한 시선을 견디는 일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엄마의 진한 머리카락 냄새를 맡고, 아비의 따듯한 뱃살 언저리에 파묻혀 함께 뒹구는 일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저 아비들이 그렇게 살았으리라 믿을 것이다.
정 다 인





동파가 동쪽에 있는 쓰러져가는 집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네요. 차를 마시는 일이 더 나은 나를 위한 수행이라는 말이 고요히 마음에 날아들었습니다. 차를 마시는 절차가 번거롭다는 생각을 해 보았더랬습니다. 그런데 그 번거로움이, 그 기다림이 꼭 필요한 일임을 마음에 다집니다. 겨울 찬 바람이 불면서 기침 소리들이 끊이지 않는 소란함 속에서도 고요히 차를 끓이며 생각을 다듬어 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