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쓰럽고 당황스러운 : 19세기 조선백자청화수복문대발
- RollingTea 구르다

- 2019년 10월 7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7월 22일
시대를 담다 : 한국·중국·일본의 차 마시는 그릇 11 _ 번외편

이것은 찻그릇인가 국그릇인가
높이 9.7cm, 입지름 21.7cm, 바닥지름 9.3cm의 큰 사발형태로 바닥과 입지름의 전통적인 1/4 균형을 깼다. 보다 투박해지는 대신 물리적인 안정감을 얻었다. 전에서 중배까지 직선에 가까운 밋밋함으로 떨어져 내려오다 배에서 바닥으로 급격한 곡선으로 흐른다. 여기에는 기교도 특별한 의도도 없어 보인다. 선은 꼭대기에 이르러 전과 만나며 살짝 도드라지듯 튀어 오르는데 입술이 편하고 안전하게 닿도록 실용성을 고려한 결과다. 전체를 놓고 보면 튀지 않고 무난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른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든다. 당장 생활용품점에 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제품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그릇이 오랜 세월 후대가 참고하고 따르는 형태의 기준을 제시했다는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선은 밋밋하고, 채색은 균질하지 못하고, 패턴은 당시의 유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 그릇은 19세기 당시 조선의 전형적인 유행을 따른 상품이다. 냉정하게 말해 작품이라기보다 상품이다.
담청이 감도는 백색유를 전면에 칠하고 구연부(전)에 청색의 가느다란 두 개의 선이 둘러쳐져 있는 이 그릇은 국립중앙박물관 초대 관장으로 재직했던 故김재원씨의 소장품이다. 그의 아들이 기증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증9024번으로 보관하고 있다.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릇의 안쪽 하단 가운데에 ‘壽(수)’자를 시문하였다. 굽다리에 추가로 한 줄의 청색선이 더 둘러져 있다. 그릇 면에는 ‘壽(수)’자와 ‘福(복)’자를 교차하여 세 단에 걸쳐 시문했다. 요즘 사람인 내가 보기에 ‘수복’이라는 글자를 시문하지 않았더라면 보다 괜찮지 않을까 싶다. 마치 15세기 관요 순백자처럼 말이다. 아쉽게도 이 글자 문양은 19세기 도자시장에서 소위 말하는 ‘인싸템’(최고로 유행하고 인기 있는 물건을 이르는 요즘 은어)이었다. 조선후기 백자에는 일반인들이 선호했던 십장생같은 길상의 의미를 갖는 다양한 문양들과 함께 문자들도 장식에 사용되었다. 특히 ‘壽’와 ‘福’자가 유행이었다. 이런 경향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명나라 시절부터 이어진 청화백자 열풍과 더불어 유학에서 고증학의 비중이 커지며 옛 비석이나 제기 등에 새겨진 글자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에 상류층 사이에서 옛 그릇을 모으는 소위 골동품 수집 유행이 다시 일어났다. 조선에서 이러한 경향을 받아들여 주인공과 같은 그릇을 구워냈던 것이다. 수복자문을 시문할 때는 안쪽 바닥 가운데 글자를 써 넣거나 한 개 혹은 두 개의 동그란 원을 두르고 그 안에 시문하는 방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후자의 경우는 조선전기에 중국 명대 민요로부터 유입된 것이다. 서체도 초서나 예서 등을 사용했으나 이 무렵에 와서는 대부분 도안화 하여 쉽고 빠르게 찍어내는 경향을 보인다. 본래 명나라에서는 이러한 글자에 대한 기호가 범어를 시문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나 조선에서는 특히 수복문에 대한 애호가 높았다.
중요한 점은 선호도가 높고 시장에서 잘 팔린다고 해서 반드시 질이 뛰어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19세기 조선의 청화백자는 말 그대로 재난이었다. 조선 백자는 두 가지 갈래를 타고 전승되어 왔다. 하나는 고려백자 계열로서 기형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면이 매끄럽고 유약은 투명했다. 다른 하나는 원말명초(元末明初) 중국 도자기가 큰 영향을 주어 새롭게 발달한 견치(堅緻) 백자다. 어느 것이 더 낫다 말다 단언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청화백자가 세종 연간에 들어오고 번조를 통해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세조 무렵이니 이 무렵까지 근 4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백자의 전통에 청화의 기법이 곁들어 기예技藝를 뽐내던 초기와 중기의 청화백자에 비하면 이 그릇은 선형도, 유약도, 창의성도 모두 평범하기 그지없다. 19세기는 격동의 사회였다. 정치와 일반사회가 완벽하게 분리되었다. 사대부란 임금을 보좌하고 백성을 굽어 살피는 지식인 엘리트 문화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정치가 사회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회는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로 인해 많은 문제와 특이점이 생겼고 도자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여느 예술 장르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서예나 그림과 같은 사대부 문화와 민간 부문에서 새롭게 태어난 예술 그 사이 어딘가 즈음에서 도자기는 방황하게 되었다. 본래 관에서 관리하고 구워냈던 도자기의 명맥이 서서히 끊어져 민간으로 이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도공에 대한 처우 부족은 근본적인 문제였다
여기에는 단순히 임금의 문제 뿐 아니라 인식, 대우, 미래에 대한 청사진 부족과 같은 복합적인 문제들이 뒤엉켜 있다. 도자기를 만들던 장인들을 포함하여 예술가들을 백공(百工)이라 불렀는데, 조선 초기의 백공은 그 임금으로 가족을 충분히 돌볼 수 있었다. 이에 관역에 전심할 수 있었고 생활의 여유는 창의력의 발산과 과정의 정교함, 마무리의 세심함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며 월봉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에 가족을 제대로 돌보는 일조차 꿈 꿀 수 없게 되자 이탈자가 속출하기 시작한다. 대를 이어 기술을 전승하던 명맥이 본격적으로 끊어지게 된 것은 이미 조선 중기 중종연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사실 고급 기술을 가진 사기장들은 다른 나라로 탈출했거나 직업을 포기한 상태로 자연스레 사라져버렸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중종 32년 4월의 기록을 보자.
“백공의 말예(末藝)를 비록 대단치 않게 보기는 하지만, 세종조 때에는 권장하지 않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온갖 장인들이 지극히 정교해졌었다. 소소한 기예에 있어서도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면 포장(褒獎)하여 사람마다 모두 힘을 다하였다. 지난번에 천사가 그림을 청했을 적에 하나도 그림에 정교한 사람이 없으므로 제때에 그려 주지 못했었다. 혹시 이와 같은 일이 재차 생긴다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므로 그전에 법을 세워 허다한 장인들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나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아울러 잘못하는 죄를 다스려 기술에 전력하도록 하였다.”
수준 높은 대우와 더불어 잘 하는 장인을 선별하여 포상하는 초기의 제도를 언급하고 있지만 참고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도리어 죄로 다스려 전력토록 강제하겠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언급도 있다. 영사 김안로가 주상에게 아뢰기를 “모든 장인들이 퇴폐한 버릇이 있어, 제 버릇을 고치지도 않으면서 도리어 원망하여, 중상하고 모함할 꾀만 합니다. 이런 풍습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다시는 국가의 일에 힘쓰려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주상의 답이 볼만하다. “인심이 극토록 완악해졌다. 그러나 나라에 헌신하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자기 몸을 잊을 것이다.”
실력 있는 도공들의 멸종에 지위 높은 나라님들만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위의 언급에서 등장한 ‘장인들의 퇴폐’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다. 진상할 음식 뿐 아니라 납품할 그릇을 담당했던 사옹원(司饔院)에서 관요의 실무를 담당했던 관리를 번조관(燔造官)이라 불렀다. 사기장들은 사실 이 번조관의 성품에 따라 일희일비 하는 구조였다. 여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1540년, “사옹원 봉사 한세명은 지금 사기번조관으로 외람된 짓을 많이 저질렀다.”라는 부분이다. 관요를 관리하는 이는 종8품 봉사였던 셈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현대이니만큼 정확한 대비는 어렵지만 오늘날로 치면 군대에서의 부사관 중 상사나 경찰에서의 경장 정도의 직급으로 볼 수 있다. 행정부에서는 8급 서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고을 사또가 종6품이니 왕실이 사용하고 사신을 접대하는 백자라는 국가의 자존심을 관리하는 핵심 재원을 이정도로 취급했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번조관들 아래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녀야만 했던 것이 사기장이었으니 그 형편은 알 만 했다. 하급 관리였던 번조관들은 사적으로 쓸 사기를 일률적으로 얼마씩 빼돌리고 징납하기도 했다. 이들의 전횡에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사기장들의 수가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다수다.
이 뿐이 아니었다. 재료 수급도 나날이 어려워져 갔다. 정부의 재정은 줄어드는데 청화백자의 수요는 점점 늘어나 재료를 수급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숙종연간에 이미 경주의 백토가 채굴하기 어려운 지경이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백토 중의 으뜸으로 쳤던 것은 양구의 흙이었다. 양구는 고을이 잔악하고 백성이 가난하여 역을 부과해도 부응할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다. 전 고을을 다 모아도 5백호에 미치지 못했는데, 산 정상까지 등반하여 채굴하여도 아무런 대가를 얻지 못함에 결국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또 도망가 결국 채굴이 불가능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성공한 이삼평이나 심수관, 백파선의 경우를 바라보며 사기장들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수요 증가에 대비하여 기술력을 보유한 인재 부족, 재료 공급의 어려움, 인프라 설비 투자에 대한 정부의 외면, 관련 종사자들의 비리가 서로 맞물리며 조선 후기의 도예 수준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비단 청화백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잡혀갔던 조선인들 중 6천여 명이 송환되었음에도 사기장들 대부분은 돌아올 수 없었다. 자발적인 송환 거부가 흔했다. 국적에 대한 차별, 신분의 제약 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일가를 이루고 가족을 충분히 윤택하게 먹여 살릴 수 있었으며, 기술이 월등이 뛰어나면 신분 상승도 꿈은 아니었다. 이삼평 일가가 도석 광산을 발견했을 때 에도막부는 일가에게 독점적인 채굴권을 허락했다. 심수관 일가는 막부와 지방 귀족들의 비호 아래 적극적인 투자와 연구로 12대에 이르러 조선 전통 자기에 새로운 조각기법인 금채기법을 덧입혀 대화병(大花甁)을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여 스스로의 우수함을 자랑했다. 금채법은 여전히 심수관을 상징하는 전형으로 인정받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 청화백자수복문대발은 사실 찻그릇이 아니다. 다만 식사에 쓰던 사발이었을 뿐이다. 조선에서 차를 마시고 차를 논(論)하는 사대부는 사화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할 즈음의 차란 영정조 시대를 거치며 일본을 통해 중국과 일본의 차와 그릇을 수입해 즐기던 사치스런 취미의 한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적극적으로 말해 이 시대에 새로 태어난 우리 찻그릇은 없다. 타국을 위해 주문 제작된 녀석들은 있었을지라도 어차피 그들은 이 땅에 남을 운명이 아니었다. 그런 시대에 태어난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친구를 가만히 보다보면 무언가 서글프기도 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인다.
저 태연하기 그지없는 안정감, 얇은 몸체와 잔뜩 긴장된 몸 선에서 발하는 소심함이 아이러니처럼 서로 엉켜 별 볼일 없음에도 이상하게 신경 쓰이게 한다. 저 몸뚱이에 문양이 없었더라면, 차라리 조그만 그림 한 점으로 만족했다면, 문자를 써도 안쪽 바닥 한 글자로 만족했더라면, 굽이 조금만 더 작았더라면, 중배에서 전으로 이어지는 선이 조금 더 유연하고 짧았더라면 하고 끊임없이 상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이 단지 도공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달린 문제일까. 창의력이란 현실의 문제를 온전히 감수하고서라도 발휘 가능한 별개의 문제인 것일까. 새로움을 디자인하는 일이 주변의 환경과 영향의 긍정적인 도움 없이 가능한 일일까.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음에도 질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 전반의 시선이 하향평준화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배고파 관요를 떠나 민요로 자리를 옮긴들 미의식이 무너져버린 세상에서,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던 셈이다. 백자이되 다 같은 백자라 할 수 없고, 청화이되 무늬만 청화로 남고 만 저 친구를 보며 아쉬운 마음이 들어 오늘 이 이야기를 쓰고 남긴다.
참고: 조선시대 문헌을 살펴보면 중국의 청화백자는 대개 ‘靑花’ 혹은 '靑華'라 지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청화백자를 일컬어 이와 같이 쓰고 있다. 반면 조선에서 만들어진 청화백자는 대체로 ‘靑畫’라고 표기하여 중국에서 들여온 것과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의 경우는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후자로 명기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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