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해와 다시 뜰 해는 알고 보면 같은 해
- RollingTea 구르다
- 2024년 12월 20일
- 3분 분량
차와 사람과 이야기 05
: 한유 韓愈
당나라의 대문호 한유(韓愈)는 801년 그의 나이 서른네 살이 되었을 무렵 친구 이원(李愿)을 배웅하며 한 편의 글을 썼다. 몇 번의 과거 낙방 이후 가까스로 합격한 스물여덟 살 이후로 이렇다 할 공적 없이 한직을 떠돌다 하릴없이 중앙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에게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씨가 가슴 속에 살아 있었다. 저 낙읍의 도성에 들어가면 대장부로 크게 이름을 떨치리라는 야망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세 살 때는 아버지를 잃었으며, 열네 살에는 형을 잃었다. 형수는 한유를 데려다가 정성스레 길렀는데, 형을 잃기 한 해 전부터 문장에 크게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문벌이나 뒷배경도 없었던 그는 몇 번의 과거에서 쓴맛을 보아야 했고, 어렵게 붙은 진사 시험 이후에도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당시의 과거제도는 문벌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최종 관직 추천 시험인 이부시(吏部試)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웃기게도 이 시험의 주관은 황제가 아니라 귀족이 담당했다. 이 말인즉 가문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한유는 또다시 세 번의 낙방 이후 재상에게 다시 세 번의 장문의 글을 올리고서야 겨우 천거되었다.
동화 속 주인공처럼 어려운 가정환경과 어려운 형편을 딛고 일어서 결국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았다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백설 공주는 태어나기로 공주였고, 인어공주도 공주님이었으며 신데렐라는 유력한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 한유는 무엇도 아니었기에 한직을 전전하며 기회를 엿보다 서른이 넘었다. 그때 자신을 찾아 저 머나먼 산골 동네 반곡(盤谷)에서 찾아온 친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둘은 얼싸안고 차와 술을 나눠 마시며 두 사람의 영원한 벗인 시간을 곁에 두고 찬찬히 노래했다.
반곡 땅에 관해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 나누며 서로 이렇게 묻고 답했을 것이다.
“이원이여, 자네 같은 인재가 왜 그런 산골에 머물며 재능을 썩히는가? 도읍으로 돌아와 나와 함께 큰일을 도모해 보는 건 어떠한가?”
“친구여, 자네는 내가 왜 반곡에서 사는지 아는가?”
이원은 궁금해하는 한유에게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세 가지 삶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나는 대장부의 삶으로 백관을 임명하고 천자를 보필하며 만백성을 굽어살피는 인생이다. 집에 돌아가면 대궐 같은 집에 수십의 아리따운 여인들이 섬섬옥수를 가지런히 모아 나를 기다리고, 수백의 하인들이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기다리고 서 있다. 이것이 천자에게 인정받아 당대에 힘을 쓰는 대장부의 삶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다음이다.
“나는 이것이 싫어서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타고난 운명이 있는 것이어서 요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오.”
한유는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운칠기삼이었을까, 아니면 운삼기칠이었을까. 아마도 자존감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던 자신의 운명이 꽃피지 못한 것은 운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지 않았을까. 나는 여기에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라 믿었던 까닭인지 서른네 살의 한유는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맹렬한 불씨에 이따금 아파하던 청년이었고, 그런 친구에게 이원은 나머지 두 가지 삶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반곡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은 은둔자의 삶이며, 거기에는 비록 육체적 불편함은 머물지라도 마음의 고달픔은 머물지 못한다.
“보는 앞에서 남의 칭찬을 받는 것보다 뒤에서 헐뜯음이 없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으며, 몸이 안락한 것보다 마음에 근심이 없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이는 때를 만나지 못한 대장부의 삶이라오.”
마지막 삶은 위인(爲人)의 것으로 시중이나 들고 권세가의 뒤를 쫓으며 발은 머뭇거리고 입은 우물거린다.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언제 목이 날아갈지 알 수 없어 벌벌 떨며 사는 삶을 살면서도 요행 하나만을 바라다 늙어 죽은 뒤에야 그치는 삶을 산 자는 과연 위인(偉人)인가 위인(僞人)일까.
한유는 이 말을 듣고 머나먼 산골 동네 반곡의 풍부함과 미려함, 한적함을 칭송하며 친구 따라 반곡으로 떠나야겠노라며 이 글을 마친다. 나는 이 글을 참 좋아하는데 한유가 한문(漢文)에 남긴 거대한 발자취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그의 문장은 현대 중화민국 이전까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문의 표본이 되었다. 유려하고 화려함을 자랑하듯 뽐내는 글쓰기에서 이성적이고 감정을 절제하는 글쓰기로의 시대 전환을 이루어 내었다는 업적과 반대로 젊은 날 한유의 이 글에는 젊은이의 치기와 문장 뒤에 녹아 있는 생생한 그의 분노나 아쉬움 같은 감정이 잘 녹아 있기 때문이다. 한족 최고의 인재 중 하나라는 위인이 가진 아우라도 당연히 좋지만, 나는 천재들의 이면에 숨겨진 사람 냄새도 좋아한다.
당신은 한유가 반곡의 삶을 동경하는 것처럼 보이시는지? 내 눈에 한유는 거칠고, 분방하며, 화를 잘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확신컨대 그는 산골 반곡에서의 삶에 닷새를 넘기지 못하고 도망쳤을 위인이다. 그의 열정은 산나물을 캐고, 풀이름을 외우며, 물고기의 비늘에 이름을 지어주는 것에 닿아 있지 않다. 그가 바라는 삶은 오직 대장부의 것이며 운이 따르지 않는다 해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살아생전에 불교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데 힘을 쏟았다. 당 헌종에게 “부처는 믿을 것이 못 되며, 부처를 믿었다가 잘 된 왕이 누가 있는가?” 따위의 독설을 내뱉었다가 사형을 당할 뻔한 괴짜이기도 했다. 그가 불교를 부정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불교가 사람들을 출세간(出世間)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속세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그 결과가 좋다 하더라도 유교적 교리상 천명을 거슬러 사회의 신분과 위계, 결속을 약화하기 때문이고 결과가 나쁘다면 결국 혹세무민의 꼴이 나 사회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반곡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하는 셈이니 당시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났었을지 상상이 되어 읽는 내내 천재의 사람다운 면모를 발견하며 즐거웠다. 한유가 이에 구멍이 날 정도로 차를 즐겨 마셔 당대에 이름 높고 굽힐 줄 모르는 기개 있는 차인으로 우뚝 섰는데 그건 아마도 이 젊은 날의 곤궁함을 이겨낸 이후의 일일 것이다.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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