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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방에 홀로 앉아


차와 사람과 이야기 07

: 이숭인 李崇仁











서거정 선생은 <태평한화골계전>에서 자락처(自樂處)에 관한 세 사람의 일화를 옮겨 실었다. 자락처란 말 그대로 홀로 몸을 즐거이 둘 수 있는 곳을 의미하는데, 쉽게 말해 한가할 때 무얼 하며 쉬면 제대로 쉴 만 한 일인가를 묻는 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삼봉 정도전, 양촌 권근, 도은 이숭인이다. 삼봉이 처음 말했다. "북으로부터 매서운 첫눈이 날리면 담비 가죽으로 만든 모피 옷을 입고, 준마를 타고 벽창우를 끌며 어깨에는 푸른 보라매를 앉히고, 거친 평원을 달리면서 사냥을 하는 일, 이것이 충분히 즐길 만 한 일이다." 이에 질세라 양촌이 말했다. "흰 눈이 뜰에 가득하고 붉은 해가 창을 비추면, 따듯하게 불을 땐 온돌방에서 병풍을 세우고 화로를 안고서,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큰대자로 누워 있으면, 그 사이에서 섬섬옥수의 아름다운 여인이 수를 놓다가 때때로 바늘을 멈추고 밤을 구워서 먹여준다면, 이것이 충분히 즐길 만 한 일이다." 도은 선생이 이어서 말했다. "산사의 고요한 방, 밝은 창가에 책상을 깨끗이 하고 고요히 기대어 향을 피운 채, 스님과 마주 앉아 차를 끓여 마시며 시구절을 주고받는다면, 이것이 내 자락처라오.“


도은 이숭인은 생애 끝자락 어느 해 섣달그믐날 밤에 산사를 찾았다. 해가 저문 밤길을 걸으며 그는 젊은 시절 서울(개경)에 살며 드나들던 그리운 스님과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스님은 도은에게 삼생의 고통에 관해 말해주었는데 새삼 그 일이 생각났다. 그는 젊어서부터 전생을 이어 현생,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내생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휴가를 받아 쉴 때가 있으면 분주한 서울을 벗어나 선사를 찾아 그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틈만 나면 절과 스님을 찾아 복잡하고 떠들썩 한세상을 비웃고 멀리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도은은 하릴없이 산을 오른다. 그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할 일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을 부탁하는 사람도, 조언을 구하려는 이도, 자신을 찾는 이도 없다. 이토록 한가로운 때가 다시 있을까 싶겠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 않다. 할 일이 없으면 도를 닦고, 참선하며, 자락처를 구하면 될 일인데 어째서일까.


갑작스레 찾아온 휴식이 그리도 반갑다지만 정작 한 달을 쉬면 마음이 조급해진다고 했던가. 도은은 산사에서 조용히 타는 초의 심지를 자르고 있는 스님을 본다. 스님은 자기 일을 묵묵히 할 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도은은 차를 끓인다. 찻물 끓는 소리는 마치 솔바람 같아야 하는데 땅벌레가 우는 듯 기괴하며 맑고 곱지 않다. 급한 마음에 글씨라도 쓰려 붓을 잡고 먹을 가는데 먹빛이 마치 까마귀가 뒤치는 듯 탁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무얼 해도 마음에 들지 않고, 어떤 것도 흡족하지 않다. 그에게는 자락처가 없다. 그가 한가로이 머물 곳은 사라지고 어제 아름다웠던 소리와 흘러내릴 듯 풍부했던 빛깔의 세상은 먹빛의 깜깜한 어둠에 파묻혀 버렸다. 마음에 땅거미가 져 내리니 감각의 세상은 그 색을 잃었다.


강이나 바다에 묶인 배를 본 적이 있는가. 한가로워 보이는 풍경이라도 파고에 출렁이는 배의 운명은 오로지 선창에 묶인 끈 한 다발에 달려 있다. 여러 개의 줄을 한데 꼬아 만든 튼튼한 밧줄에 묶인 배는 바람 앞에서도 당당하고, 파도 위에서도 의연하다. 하지만 그 줄을 놓쳐 떠다니게 된 배는 길을 잃고 방황할 뿐이다. 바람과 물결이 뜻하는 대로 그저 물 위에 뜬 채 떠다닐 뿐이니 더 이상 그것은 배이되 배가 아니고, 존재하되 존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묵묵하게 심지를 자르고 있는 스님은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반복할 뿐이니 젊은 시절 도은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참된 깨침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인생이란 것이 이토록 외롭고 힘든 것이었던가. 의지할 데 없는 삶 앞에서 초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의 자락처는 홀로 머물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쓸쓸했나 보다.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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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no Amiet, Schneelandschaft,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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